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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 김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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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 김학철





김학철 지음 | 비아
정가 17,000원 | 2022년 7월 28일 출간 | 256쪽 | 200×130×14mm
ISBN │ 979-11-91239-85-0 (03210)

 

| 책 소개 |

그리스도교 교양학자이자 신약학자인 김학철이 성서화와 성서를 넘나들며 삶의 의미를 살핀 신학 에세이. 성서 본문과 여러 성서화를 찬찬히 살피는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통찰을 길어낸다.
 그리스도교가 서구 문명에 뿌리내린 이후 성서 본문을 바탕으로 한 성서화는 미술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 삼위일체’,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이 사람을 보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 알브레히트 뒤러, 렘브란트, 루벤스, 고갱, 조르주 루오, 샤갈 등. 서구 미술사의 수많은 대가는 성서 본문을 읽고 해석해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모두 미술로서 성서 주석을, 신학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을 그러한 눈으로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이들의 신학적 통찰을 자기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신학자, 성서학자 또한 드물었다. 오히려 역사학과 언어학에 기반을 두고 ‘원문의 본래 의미’에 무게를 둔 성서학자들, 교리를 중시하는 신학자들은 이들의 작품이 ‘본문의 본래 의미’에 어긋난다고, 왜곡한다고 비평하기 일쑤였다. 각 작품에 사용된 기법, 화가의 재능, 미술사적 의의에 주목한 미술사학자들 역시 그 작품에 어떤 신학적 해석이 들어 있는지는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다.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그리고 엔디 워홀에 관한 논문을 통해 예술가들의 작품에 담긴 신학적 의미에 주목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와 같은 대중에게 친숙한 화가들, 새뮤얼 박, 프레데릭 구달, 윌리엄 제임스 웹과 같은 상대적으로 낯선 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살피며 이들의 신학적 해석에 주목하고 저자 고유의 생각과 성서 지식을 합쳐 성서 본문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 삶의 핵심 질문들을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통찰들이 펼쳐진다.
  성서 읽기와 관련해 적확한 한국어로 표현된 글, 그러면서도 신앙과 관련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글을 구하는 이들, 그리스도교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 일상 가운데서 영원을,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자극과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 지은이 |

김학철金學哲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마태복음 해석』(대한기독교서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문학동네),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대한기독교서회), 『고전으로 읽는 성서 - 마태복음서』(EBS Books) 외에 십여 권의 (공)저역서 및 30여 편의 논문을 썼다. 한국신약학회 편집위원장, 한국기독교교양학회 학술진흥위원장, 한국기독교학회 편집주간 등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로 그리스도교 교양학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 차례 |




여는 말
성서의 시각적 읽기, 그리고 신상으로 살아가기
성서의 시각적 읽기
신상으로 살아가기
인간됨과 창조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새뮤얼 박의 《전쟁 때의 창조》
새뮤얼 박의 《베레쉬트 바라》
믿음의 손
하갈의 불운한 운명과 동정 어린 시선
불행과 동정을 넘어서는 믿음의 어머니의 손
꽉 막힌 현실, 위를 가리키는 손
믿음을 점검하는 손
소망의 발걸음
머문 별을 보다
권리를 찾는 과부
아리마태아 요셉은 무엇을 찾았는가
차마 못하는 마음과 정의
정의로운 요셉의 차마 못하는 마음  
위로의 아들, 요셉
포도원 주인의 정의와 차마 못하는 마음
기적의 내면
‘기적’이 놓인 오늘날의 자리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 속
내가 아는 한 가지
기억의 윤리  
호세아의 가족 기억하기
크리스마스와 거절된 위로
이 여인을 기억하는가?
사랑의 힘
합당한 예절로 뵈뵈를 영접하라
필레몬의 쓸모없는 종을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기
기만의 비극
디나는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반복되는가?
빌라도의 씻어낼 수 없는 손  
측은지심의 보행 - 길 위의 예수 -
나가는 말
보론



| 책 속으로 |

나는 이 책이 고갱의 그림이 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00여 년 이전에 기록된 성서의 구절을 붙들고, 그것을 자신의 혼과 영과 육으로 그려낸 화가의 그림을 찬찬히 살피면서 중요하 지 않은 듯 뒤로 미뤄놓은 삶의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잠깐이라도 머물러 보자. 영원에 관해 묻고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겸손하게 나 눌 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지고, 그래서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 다. 많은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많은 질문, 그것도 영원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물음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하느님의 영이 그렇게 인생의 본질을 묻는 이들에게 은혜로 함께 해 주시지 않을 리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일을 도우려 한다. 답보다는 더 위대하고 섬세한 물음을 독자들과 더불어 묻고 생각하려 한다. ---p. 14

야훼 하느님을 나타내는 신상을 절대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선언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신상이니 그를 하느님 대하듯 존중해야지 다른 신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신상을 따로 만들면 안 되니, 그것을 따로 둘 신전이 필요 없다. 이것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가 현현하는 신전을 전면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있는 모든 곳이 신전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애당초 성서는 온 세계를 신전으로, 모든 인간을 신상으로 선언하는 급진적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곧 그분의 형상으로 이 세상을 신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몸이 신전이고, 그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오감으로 체험하도록 살았다. 따라서 그를 따르는
이들의 몸, 그리고 그 모임이 신전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한 산 제물 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은 임마누엘의 신전이 된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고, 이 세상과 길항하면서도 새 세상의 꿈이 실현되는 움직이는 신전이다. 신앙인들은 성서의 뜻에 따라 세상 을 신전으로 삼고 신상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누군가 “돌 위에 쌓 은 돌”을 두고 신전이라고 부르거든 그것은 성서적 신앙이 아니라 고 말해주어야 한다.  이처럼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종국에 신의 형상으로서 살아가 기를 향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삶의 신앙-예술적 형상 화다. 성서 본문을 시각화하고 나아가 예술화하려는 노력은 우리 삶을 시각화하고 나아가 신앙-예술화하려는 것으로 향한다. 성서 를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신앙-예술품으로 조형해 나가려는 것이다. --p.33~34.

프레데릭 구달(1822~1904)은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해서 통념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그림 10). 하갈은 어린 이스마엘과 함께 뒤돌아서 아브라함의 집을 보지 않는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기대기보다 하느님의 언약을 믿는다. 비록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정처 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막막하고 광활한 광야뿐이고,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물 한 동이와 빵 한 덩어리뿐이다. 아이는 어리고, 자신은 유린당하기 쉬운 여자다. 그러나 하갈은 걸어간다. 불끈 쥔 오른손은 그의 믿음과 의지를 보여준다. 하갈은 물동이를 어깨에 이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이 결코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려 한다. 비록 떠나는 길에 굶주림과 지독한 갈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는다. 이스마엘도 어리광을 피우지 않는다. 그는 빵 가방을 들고 제 몫의 일을 하려 한다. 아이는 ‘엄마’를 바라보는데, ‘엄마’의 의연한 태도를 자신도 모르게 몸에 익힐 것이다. 믿음은 동정을 자아내는 불행과 고통에서 위로를 얻으려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언약을 믿고 나아가는 굳게 움켜쥔 손에 있다. 그렇게 꼭 쥔 손을 하느님은 잊지 않으셨다고 성서는 보도한다. ---p.64~65.

라파엘로는 1516~1520년 여러 화가가 흔히 ‘예수의 변모’ 혹은 ‘변모산상의 예수’라는 제목으로 그리는 마르코 복음서 9장 2~8절(병행 본문 마태 17:1~13, 루가 9:28~36)을 본문으로 유화 한 점을 그렸다(그림 11). 르네상스를 전후로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자인 화가가 변모산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다지 새로울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본문 해석은 이전과 이후 다른 화가와 달리 매우 섬세하였고, 그것이 그의 그림에 독창적으로 나타났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으로 아마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그의 제자들은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걸작의 가능성이 농후한 그 작품의 마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모산상의 예수를 그린 다른 그림들과 이 그림을 구분해 주는 가장 큰 특징은 이 그림에는 예수가 산 위에서 변모할 때 그 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 동시에 그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라파엘로는 예수가 산 위에서 변모할 때 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동시적 사건으로 보고, 그 두 사건을 함께 묶어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산 위의 변모 사건과 산 아래 사건을 동시에 묶으면서 그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키아로스쿠로는 그림에서 빛을 처리하는 방식인데,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산 위와 산 아래를 각각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는 구분을 두고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그의 책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에서 아폴로적인 원리와 디오니소스적인 원리 사이의 갈등 이미지라고 불렀다. 니체가 그림에서 뚜렷한 구분을 읽어낸 것은 적절했으나, 그 구분의 기준을 밝히고 명명한 데에는 실패했다. 라파엘로가 의도한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 사이의 대조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및 권능과 인간의 무기력 사이의 대조다. 이런 극적인 대조는 이미 살펴본 대로 산 위에서 예수가 변모를 통해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지만,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은 무능과 비참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를 예술적으로 표현한다. ---p.71~72.

평소 빌라도가 보인 잔악함을 미루어보면 나사렛 촌구석 출신의 시골뜨기 젊은이 재판에 그가 신중히 임했을 리 없다. 아마 평소 같으면 그런 정도의 인물은 만나지도 않은 채 유대인 지도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고발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시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던 빌라도에게 특별한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아내는 꿈을 통해 빌라도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따라서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가 의인이며, 그에 대해 잘못된 판결을 한다면 빌라도가 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라고 간절하게 알려준다. 하여 빌라도는 나름 애를 쓴다. 유대 혁명 운동을 하던 바라바라는 소문난 죄수 대신에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한 듯이 마태오 복음서는 보도한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과 그에 선동된 사람들은 바라바가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 곧 로마에 반역한 사람들에게 주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에 다시 한번 직면했다. 또 민란이 일어날 징조도 위협적으로 느꼈다. 역사가들이 보도하는 빌라도라면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쉬운 편을 택한다. 무죄한 사람 하나를 죽이는 편이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보다 간편했다. 예수라는 나사렛 촌놈의 목숨이 무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자신의 부인이 전해준 꿈 이야기만이 다소 찜찜할 뿐인데, 어차피 살인의 의도와 진행은 저 유대인들의 주장 아래 시행되는 것 아닌가.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손을 씻는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켰고, 혹시 자신에게 쏟아질지 모르는 신의 분노도 그들의 몫으로 돌렸다. 그 후로 2,000년이 흐른 오늘날 매 주일 수십억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사도신경을 통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에게 고난을 주었고,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외우며, 그를 고발한
다. 손을 씻은 그를, 유대인들의 성화와 위협에 못 이긴 그를, 그래도 예수를 살려주고 싶어 했던 그를.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손을 씻었지만, 그리고 유대인들의 입으로 직접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후대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최종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똑똑히 기록한다. 왜 그러한가? 그에게 사형판결권이 있기 때문이다.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책임 또한 있다. 빌라도는 그 당시 그 무리 앞에서는 손을 씻고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 그는 결코 씻어내지 못한 피 묻은 손을 가진 사람이다.  --p.195~196.

| 출판사 서평 |

“2,000여 년 이전에 기록된 성서의 구절을 붙들고, 그것을 자신의 혼과 영과 육으로 그려낸 화가의 그림을 찬찬히 살피면서 중요하지 않은 듯 뒤로 미뤄놓은 삶의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잠깐이라도 머물러 보자. 영원에 관해 묻고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겸손하게 나눌 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지고, 그래서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
다. 많은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많은 질문, 그것도 영원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물음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하느님의 영이 그렇게 인생의 본질을 묻는 이들에게 은혜로 함께 해 주시지 않을 리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일을 도우려 한다.” - 여는 말에서

그리스도교 교양학자이자 신약학자인 김학철이 성서화와 성서를 넘나들며 삶의 의미를 살핀 신학 에세이. 성서 본문과 여러 성서화를 찬찬히 살피는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통찰을 길어낸다.
 그리스도교가 서구 문명에 뿌리내린 이후 성서 본문을 바탕으로 한 성서화는 미술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 삼위일체’,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이 사람을 보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 알브레히트 뒤러, 렘브란트, 루벤스, 고갱, 조르주 루오, 샤갈 등. 서구 미술사의 수많은 대가는 성서 본문을 읽고 해석해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모두 미술로서 성서 주석을, 신학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을 그러한 눈으로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이들의 신학적 통찰을 자기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신학자, 성서학자 또한 드물었다. 오히려 역사학과 언어학에 기반을 두고 ‘원문의 본래 의미’에 무게를 둔 성서학자들, 교리를 중시하는 신학자들은 이들의 작품이 ‘본문의 본래 의미’에 어긋난다고, 왜곡한다고 비평하기 일쑤였다. 각 작품에 사용된 기법, 화가의 재능, 미술사적 의의에 주목한 미술사학자들 역시 그 작품에 어떤 신학적 해석이 들어 있는지는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다.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그리고 엔디 워홀에 관한 논문을 통해 예술가들의 작품에 담긴 신학적 의미에 주목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와 같은 대중에게 친숙한 화가들, 새뮤얼 박, 프레데릭 구달, 윌리엄 제임스 웹과 같은 상대적으로 낯선 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살피며 이들의 신학적 해석에 주목하고 저자 고유의 생각과 성서 지식을 합쳐 성서 본문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 삶의 핵심 질문들을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통찰들이 펼쳐진다.
  성서 읽기와 관련해 적확한 한국어로 표현된 글, 그러면서도 신앙과 관련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글을 구하는 이들, 그리스도교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 일상 가운데서 영원을,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자극과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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