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결단이란 당신의 평판과 ‘성공’을 포함해서 세상과 당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넘긴다는 결단이다. 이것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아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보다 이것은 당신의 행동 방식에 관한 결단이다. 즉 당신이 하나님을 의존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당신이 결과를 주관하지 않는다.(10쪽)
고독과 침묵은 인간의 불행과 죄의 근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공략하므로 가장 근본적인 영적 훈련이다. 고독 속에 있겠다는 것은 장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취를 일체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독을 완성하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고요함에 들지 않는 한 아직 세상이 우리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소유로 족하다. 우리는 자신에게 영혼이 있고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며 이 세상이 ‘ 내 아버지의 세상’임을 재운다. (11쪽)
이 책이 왜 고독과 성경, 고독과 기도, 고독과 일기가 아니라 고독과 침묵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물론 영적인 삶의 다른 모든 면들도 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굳이 고독과 침묵에 대해 쓰기로 한 것은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침묵이야말로 가장 도전적이고 요긴하면서도 가장 경험이 적은 영적 훈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읽기는 쉽지만 정말 침묵하기는 어렵다.(21쪽)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시정하고 해결함으로써 영적 삶에 진보를 이루려는 나 자신의 노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늘 뭔가 성취해 내는 스타일이다. 무슨 일이든 열성으 다하는 버릇이 하도 오래되다 보니, 침묵 속에 혼자 앉아 있는 것처럼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활동’은 내 평소의 삶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32쪽)
고독과 침묵은 번잡한 영혼에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쓰라고 있는 사치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는 인간의 관념과 노력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마음을 여는 구체적인 길이다. 고독과 침묵의 습관이 근본적이 까닭은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34쪽)
하지만 절박감과 갈망 이라는 쌍두마차가 나를 교착 상태에서 끄집어내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다. 그곳은 평소 내 노력의 특징인 밀어붙이기와 억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도에 따라 영적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였다.(35쪽)
고독과 침묵은 그 자체가 목푝라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 또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변화 사역을 위해 꾸준히 우리를 그분께 내어드리는 수단일 뿐이다.(41쪽)
이렇듯 고독으로 갈 때면 누구나 맡은 일에 대한 걱정은 물론 고독의 경험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동경, 갈망 등 많은 것들을 지니고 간다. 붙들고 있는 것은 많은데 그에 따른 대처 방도를 모르면 자칫 고독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들에 주목하고 정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53-54쪽)
두려움을 무시하지 않고 경청하면 고독과 침묵에 대한 자신의 의식 및 무의식의 저항을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우선 고독과 침묵은 우리를 평소의 산만한 것들, 곧 내면세계에 닿지 못하게 막는 것들에서 벌어나게 한다. 인간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평소의 산만한 것들에서 벗어나면 그간 외면해 온 실체를 접할 수 있게 된다.(57쪽)
이 갈망은 두려움의 이면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두려움 및에 갈망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기를 바라는 갈망, 느끼고 알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싶은 갈망, 전적인 신뢰와 위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싶은 갈망이다.(60쪽)
고독과 침묵의 기간 동안 나의 길잡이가 되어준 것은 갈망이었다. 갈망은 우리의 마음이 구하는 더 깊은 친밀함으로 우리를 부른다. 고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갈망을 드는 것이다. 그 갈망이 시간을 두고 구체화되고, 초첨이 잡히며, 명확해지도록 두는 것이다. 요즈음 당신의 갈망이 하는 말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듣고 있는가?(63쪽)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판단하는 시간이 아니라 보는 시간이다. 주어진 순간에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그 본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시간이다. 다시 말해 고독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보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쉬라는 그분의 초대를 듣는 시간이다.(70쪽)
그러나 이와 달리 좋지 안하은 피로도 있다. 곧 ‘위험한 피로’이다. 이것은 한동안 열심히 뛰며 일한 뒤에 오는 일시적인 피로보다 더 깊고 심각하다. ‘좋은 피로’와 ‘위험한 피로’의 차이는 봄철에 무해한 비구름을 형성하는 기상 조건과 돌풍이 불듯 하늘에 음산한 먹구름이 덮이는 기상 조건 사이의 차이와도 같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 우리는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심상찮은 조짐이 느껴지고, 그래서 조심해야 함을 안다.(71쪽)
몸이 쉬는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선물이며,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이고 잘 쉬는 것, 몸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임재를 알리시는 장으로 존중하는 것은 영적 순례에서 중요한 훈련이다.(84쪽)
비어지는 경험은 괴롭지만 비룸은 채움의 선결 조건이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영혼에 그 분을 받아들일 공간이 있을 때 가장 넘치게 부어진다. 인간 영혼의 광활한 빈들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자리가 있다.(116쪽)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씀이 들려올지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열린 마음으로 듣지 못한다. 즉 내가 싫어하는 일만 골라 시킴으로써 흥을 깨는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지극히 선함을 믿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진실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거두어 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148-149쪽)
부담감 때문에 거창한 이타적인 행위를 스스로 강요하거나 애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독과 침묵 속에서 벌어지는 이들이 결국에는 다분히 ‘남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170쪽)
사랑이신 하나님만큼 우리를 채워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임재하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것도 없다. 침묵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안에 낳으시는 것을 다른 어떤 것도 낳을 수 없다.(173쪽)